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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이해

by Augustine Suh   10/30/2016     0 re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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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사도신경: 곡해에 대한 반박과 바른 이해

서 어거스틴

“오직성경으로” (sola scriptura) 그리고 “근원으로 돌아가라” (ad fontes)를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회의 사도신경을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으로 인정하였다. 이는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역사적 가르침을 잘 요약하고 있으며 우리교회가 역사적 정통신앙에 머물도록 방향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을 포함하여 초대교회의 신경들이 단지 인간의 작품이며, 나아가 사단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도신경은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성경적 교회는 이런 신경을 철저하게 배격해야 하며, 심지어 사도신경을 고백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허황된 주장을 퍼뜨리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들이 최근에 “비 성경적인 사도신경”이라는 제목으로 “빛과 흑암의 역사”라는 인터넷 사이트 (2013 10월 27일)에 게재되어 사람들의 호응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극단적 분리주의자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에 대해 응답할 가치가 없지만, 이런 사람들의 주장이 우리 교회에 끼치는 해악때문에 우리는 대답의 필요성을 느낀다.

이런 필요에 따라 이 글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재, “비 성경적인 사도신경”이라는 제목으로 “빛과 흑암의 역사”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게재된 주장들의 허구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사도신경을 곡해하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극단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드러내고자 한다. 둘째, 사도신경이 교회 내에서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고, 사도신경을 성경적으로 정당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1.종교개혁자들과 사도신경

필자는 먼저 종교개혁과 사도신경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비성경적인 사도신경”이란 제목으로 사도신경을 배격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종교개혁과 종교개혁자들의 권위를 빙자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10월 31을 기하여 행해진 “비성경적인 사도행전”라는 제목의 설교는 루터, 칼빈, 쯔빙글리를 운운하고 있다. 특히 그 “용감한” 설교는 루터를 앞세워서 사도신경을 정면으로 부인하며 정죄하고 있다. 우리가 “루터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도신경을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처럼 “사람이 만든 것은 어떤 것이라도 부인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신경을 어떻게 보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자들의 기치를 이해해야 한다. 종교개혁의 중심에 놓여있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가 종교개혁의 내적인 원리였다면, “오직 성경으로”는 내적인 원리를 담는 외적인 원리였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기치는 모든 신학적인 주장과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해 있어야 하고, 성경에 의해 검증이 되어야만 하는 것을 선언하고있다. 그러면 성경의 최고권위를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이 사도신경을 어떻게 보고 대하였는가?

16세기 종교개혁의 선두자인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그리고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내세우면서 부패한 교회에 도전하며 개혁을 이루어갔다. 그는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가르침과 관행들에 대해 싸웠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진영내에서 생겨난 극단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의 많은 글들은 전투적인 상황에서 쓰여졌고, 잘못을 바로잡고 바른 성경적 교리를 가르치는데 기여하였다. 종교개혁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 루터는 신자들에게 바른 신앙의 기본적인 내용들을 가르쳐야 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 위하여 소요리문답 (Kleiner Katechismus)과 대요리문답 (Grosser Katechismus)을 썼다. 특히 대요리문답의 제2부에서 믿음에 대해 (Vom Glauben)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루터가 광범위하게 사도신경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1] 즉 그는 여기서 사도신경에 기초하여 성경적 신앙의 중심적인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먼저 사도신경을 서론적으로 소개하고 나서 차례대로 사도신경의 제1조, 제2조, 제3조를 따라가며 기독신앙을 강해하고 있다. 루터가 신앙의 기본적인 내용을 가르치기 위해 사도신경을 사용한 것을 볼 때 우리는 그가 사도신경의 위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장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고 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보라, 당신은 여기에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의 모든 본성, 그의 뜻, 그리고 그의 일에 대하여 아주 간결하지만 매우 함축적인 말로 가장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에 인간들이 알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지혜가 들어있다. ... 여기에 모든 것들이 아주 충만하게 들어 있다. 왜냐하면 이 세가지 조항들 안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 심장과 그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냈기 때문이다.[2]

이와 같이 루터는 사도신경이 성경적 신앙을 짧지만 참되게 잘 요약하고 있다고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이 알아야 할 신앙의 기본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사도신경을 사용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사도신경 강해 설교도 하였고 이를 통하여 신자들을  교육하였다.

나아가서 루터는 사도신경에 있는 신앙고백을 통해 기독교신자와 다른 종교인들을 구별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따라서 사도신경 믿음의 조항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땅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며 나눈다.“[3] 물론 사도신경을 형식적으로 외운다고 해서 참된 신자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도신경이 외적 기준이 되어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면 기독신자인지 아닌지를 외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2세대였던 칼빈은 전 성경에 기초하여 종교개혁을 좀더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일생을 바쳐 신구약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하였으며, 그의 저서인 기독교강요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통해 성경적 신학을 요약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성경적 신앙을 해설하며 가르칠 때에 사도신경의 신앙 조항들의 순서를 따르며 그 내용을 강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사도신경이 역사적 성경적 신앙을 잘 요약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룬 제2권을 마무리하면서 사도신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그대로 따랐는데, 이는 그것이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해주며,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을 하나씩 명확하게 보도록 해 주는 일종의 도표와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4] 다시 말하면 사도신경이 우리 신앙의 중요한 점들을 짧게 잘 요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요약이 하나님의 역사를 순서에 따라서 잘 정리하여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사도신경은 “우리 믿음의 전 역사가 그 속에 간결하고도 명확한 순서로 정리되어 있으며, 또한 성경의 순전한 증거들로 보증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5]

위와 같이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사도신경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과 교회에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종교개혁자들의 분명한 증거와 내용에 기초하여 볼 때, 사도신경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교회들을 종교개혁자들의 이름으로 정죄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부류 중의 하나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첫째, 열심은 가상하게 보이지만, 신학을 우습게 여기는 무지한 열심으로 전혀  사실 무근한 주장을 하고 있다. 둘째, 만일 종교개혁자들이 사도신경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면서도 종교개혁자들을 빙자하여 사도신경을 정죄한다면, 이는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하고자 간계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2. 사도신경의 기원과 역사

종교개혁자들이 사도신경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위에서 본 것처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경적 신앙을 매우 간결하게 요약해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종교개혁적 신앙은 교회역사적 정통성에 근거하여 사도신경을 지지한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신경의 출처가 어디든 간에 교회가 처음 시작되던 사도 시대에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동의와 공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대해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6]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직접 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이 합법적으로 그 칭호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사도신경 안에 있는 신앙고백의 핵심적인 조항들에 대한 형태가 이미 주후100년경에 형성이 되었다는 것이다.[7] 대부분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에 따르면 사도신경의 기원은 초대기독교의 세례의식에 있다.[8] 새신자가 세례를 받을 때 질문의 형태로 신앙고백이 주어졌고, 이를 배우고 고백하는 증표(symbolum)에서 시작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문헌 가운데 이런 형태를 가장 가깝게 보여주는 것은 215년 경에 쓰여진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사도적 전통“ (Apostolic Tradition)에 있는 고백이다. 히폴리투스의 질문형태의 신앙고백 (Interorogatory Creed)은 다음에서 보는 것처럼 현재 사도신경과 구조가 동일하고 거의 기본적인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다[9]:

당신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습니까? 그분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까?

당신은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교회와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까?

히폴리투스의 신앙고백외에 마르셀루스(Marcellus) 신조 (340년)가 있는데, 이는 마르셀루스가가  율리우스 (Julius I)에게 보낸 서신에 있는 신조로서, 히폴리투스 고백과 비교하여 “죄를 사하여 주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이 첨가된 것을 볼 수 있다. 404년경에 루피누스 (Rufinus)가 쓴 사도신경 주석에 나타난 사도신경 형태도 이후의 공인 본문 (textus receptus)으로의 발전형태를 어느 정도 보여준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형태가 언제부터 교회에서 사용되어졌는지는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공인 본문 중에 지금까지 발견된 것으로 가장 이른 것은 700년 경에 프랑스 남부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Priminius의 De singulis libris canonicis scarapus).[10] 이 사도신경은 부분적으로는 카롤링거의 교회정책의 영향으로 교회의 예배의식의 일부분이 되었고 이후에 서방교회의 중심신앙고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11]

이상에서 우리는 사도신경이 2세기무렵부터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았다. “비성경적인 사도신경”은 사도신경이 니케아 공회의 작품인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전혀 근거없는 말이다.[12] 오늘날 사용되는 형태인 공인본문의 형태는 늦어도 700년 무렵부터 사용되었지만, 그 근원은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틴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이 사도신경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적극적으로 환영하였고 교회의 에큐메니칼 고백으로 인정하였다. 현재 전세계 기독교회에서 사도신경은 가장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사용되는 신앙고백이다. 현재 개신교 내에서만 볼때도 모든 주류 교단들 (루터교회, 개혁교회, 장로교회, 성공회, 그리고 감리교회 등)은 사도신경을 핵심적인 신앙고백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며, 대부분 침례교회 및 오순절 교회도 사도신경을 예배에서 사용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중요성은 인정하고 있다. “비성경적인 사도신경”을 주장하는 자는 유독 한국장로교만 사도신경을 고백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실은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경솔하게 말을 내뱉고 있고, 교회의 역사성에 대한 의식을 전혀 가지지 않은 사람이다.

3. 사도신경의 신학적 중요성

그러면 사도신경을 전면부인하는 것이 왜 심각한 문제인가? 오늘날 사도신경이 우리 기독교회에서 가지는 위치는 무엇인가? “오직 성경으로”를 주장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이 왜 사도신경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는가? 이 사도신경의 신학적 의미에 관한 질문은 기독신앙의 정통성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질문이다. 기독교 교리와 삶에 관련하여 성경을 최고권위로 인정한다는 것이 교회의 신조 또는 전통과 어떤 관련을 가지는지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우리는 전통(tradition)이라는 말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회사를 볼 때 교회의 “전통”을 이해하고 대하는 방법은 세 가지로 분류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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