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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적 성령론

by ChangWon Kim   10/30/2016     0 re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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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u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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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nitarian Pneumatology for formation Holy Community

(거룩한 공동체 형성을 위한 삼위일체론적 성령론)

김 창원 (UBF 관악 1부 책임목자)

[성령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오해들]

최근에 일어난 일입니다. ‘지난 12월 5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인터컨티넨탈 호텔 객실에서 41세 한국인 여성이 구타당한 끝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12월 8일자로 독일 현지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여성은 수 시간 동안 침대에 묶여 입에 수건이 덮인 채 복부와 가슴 쪽에 매질을 당한 끝에 질식사 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현장에 있던 5명을 살인 행위로 체포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들은 한국에서 같은 교회에 다녔던 신자들로 알려졌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는 44세의 여성의 주도로 이들은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소위 ‘안찰기도’를 했고, 그 결과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습니다.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한 집사에게 대학 시험을 보아야 하는데 무슨 과를 선택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집사는 "수학과를 선택하면 합격할 것이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학생은 수학과를 선택했고, 놀랍게도 결과는 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대학 내내 수학에 흥미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겨우 졸업을 하긴 했지만 졸업 후에 취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임파테이션’이란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안수를 통해 방언을 받게 하고, 병고침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이 권능의 손을 내밀면, 사람들이 쓰러지고 뒹굴고 깔깔 거리며 웃는 일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아말감으로 떼운 이가 금 이로 변하고 얼굴에 금가루가 뿌려집니다.

이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기운’, ‘힘’, ‘신비적 능력’과 동일시하여 자신들이 언제든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늘 외치는 말은 “성령을 받아라!”입니다.

하지만 기적은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악령도 기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한 무슬림 예언자는 야자열매를 금덩어리로 변하게 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미국의 어떤 그리스도인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두 다리는 길이가 5cm 차이가 났습니다. 그녀는 기적을 행한다는 주술사를 찾아갔는데, 놀랍게도 두 다리의 길이가 같아지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후로 심한 우울증과 심리적 불안 증세에 빠졌습니다. 견디다 못한 그녀는 담임 목사님께 이 문제를 상담했습니다. 이 상담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심각한 죄를 지었고 깊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회개 후에 그녀에게서 우울증과 불안 증세는 사라졌습니다. 또한 그녀의 다리도 예전의 5cm 차이로 돌아왔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실용주의적 이해도 있습니다. 이런 이해를 가진 사람은 성령을 오직 실용주의적인 목적에 이용하고자 합니다. 성령의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 무료한 일상에서 탈출해 보려고 합니다. 초월적 경험, 엑스터시, 방언, 환상 등의 경험을 통해 일상의 무료함에서 탈피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려 합니다. 또한 이런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한 사람인 것을 입증해 보이고자 합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사역은 어렵고 신앙생활은 지지부진 해 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나른 한 오후에 커피나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면 힘이 버쩍 나는 것처럼,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경험하면 신앙생활에 짜릿한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경험을 간구합니다.

성령에 대한 실용주의적 이해의 극단은 성령을 끊임없이 자신의 사역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결국 성령은 사역자의 영광과 번영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밖에 치부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성령은 사역의 성장을 통한 사역자의 자기 욕망 충족의 보조자로 전락되고 맙니다.

앞에서 제시한 예들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불과 몇 가지 오해들에 불과합니다. 이보다 훨씬 더 많고 다양한 오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성령을 체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성령께서는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고, 과연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 성령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과연 우리들에게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고 있을까요?

1. 성령은 삼위 중 한 위격이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의 기록은 한 마디로 ‘창조-타락-구속-완성(회복)’이라는 토대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제시됩니다. 창조, 보존, 통치는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와 더불어 비로소 일하기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영원부터 영원까지이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님의 내적 사역들(ad intra) 과 외적 사역들(ad extra) 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의 위격적 속성들이 하나님의 내재적이고 영원한 사역임을 알려 줍니다. 위격적 속성들이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속성들을 말합니다. 성부의 위격적 속성은 ‘성부 됨(fartherhood)’ 혹은 ‘태어나지 않음’(nonbegottenness)입니다. 성자의 위격적 속성은 ‘아들 됨’(filiation)입니다. 성령의 위격적 속성은 ‘나오심’(procession) 혹은 ‘내쉼’(spiration)입니다. 이 속성들이 곧 하나님의 내재적인 사역입니다. 성부는 영원히 ‘낳으시는 분’(beget), 성자는 ‘영원히 낳아 지시는 분’(begotten), 성령은 ‘영원히 나오시는 분’(procession)으로 일하십니다. 성부는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영원히 성자에게 주어 그 안에 있게 합니다. 또한 성자와 더불어 그 생명을 성령에게 주어 그 안에 있게 합니다(요 5:26). 성부는 세상에 기초를 놓기 전부터 성자를 영원히 알고 사랑하며(마 11:27; 요 17:24), 성령은 성부의 깊은 것들을 살핍니다(고전 2:10). 그래서 세 위격들 사이에 있는 교통은 절대적으로 활동하는 생명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사역들은 하나님의 외부에 있거나 있게 될 어떤 것과 연관이 없으며, 신적 존재 자체 내에서 발생하여 그 존재 안에 있는 세 위격들의 상호 관계와 연관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작정이라 불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는 사실이 무엇일까요?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한 위격이십니다. 성부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똑같이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부와 성자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똑같이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어떤 기운이나, 힘이나, 세력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이십니다.

물론 성경은 성령님을 물, 불, 바람, 비둘기 등의 이미지와 함께 등장시킵니다. 이는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anthropomorphism)적 표현들로서만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알릴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물들의 창을 통해 그 너머에 계시는 성령의 하나님 되심을 보기보다, 단지 경험의 현실 안에 안주하려고 하다가 보면 성령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교회역사 속에서 성령을 기능적인 측면과 은사적인 측면 즉 성령의 유용성에만 매달림으로써 성령의 인격성을 도외시한 예는 수없이 찾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격성과 성령의 하나님 되심이 교회 안에서 희미해지는 비극은 오늘날 교회의 상황 속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10, 11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분이 성령이심을 증거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의 영은 어떤 분이실까요? 그 분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완전히 파악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장의 사건도 성령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절) 이라고 물었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는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단언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성령께 거짓말 하는 것”과 “하나님께 거짓말 하는 것”은 상호 교환될 수 있는 표현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아나니아가 거짓말을 범한 성령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역사적으로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신앙고백들 속에 담았습니다. 325년 니케아 공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고백 속에 일관되게 성령의 하나님 되심이 고백되었습니다. 우리에 잘 알려져 있는, 1643년 7월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성령님의 신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本體)는 하나이시나 삼위로 계신다.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으시고, 낳으신바 되지도 않으시고, 나오시지도 않으시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낳으신바 되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성령께서 삼위 중의 한 분이신 하나님이란 사실은 너무나 명백한 성경의 증거이지만, 우리는 자주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이란 사실은 그 분은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그 분은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순종하고 따라야 할 분이십니다.

2. 성령은 창조의 영이시다

삼위 하나님의 내적 사역은 외적 사역과 분리되지는 않지만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삼위의 외적 사역은 창조, 보존, 통치로 나타납니다. 작정과 함께 하나님의 외적 사역은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eternal counsel of God) 안에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시행은 창조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만물을 창조했습니다(창 1:2-3; 시 33:6, 104:29, 148:5; 욥 26:13, 33:4; 사 40:13, 슥 12:1; 요 1:3; 골 1:16; 히 1:2 등). 성부가 창조주이신 것처럼, 말씀이신 성자,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도 창조주시고, 뿐만 아니라 성령님도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와 관련한 성령의 사역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2절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yIM'h; ynEP.-l[; tp,x,r:m. ~yhil{a/ x:Wrw>))))" 여기서 ‘운행한다’(hover)는 히브리어 단어는 ‘라하프’인데요, 이 단어는 ‘떨다, 두근거리다’는 의미입니다. 이 해석은 렘 23:9절 “내 모든 뼈가 떨리며,” 그리고 이사야 63:7-14에서 성령을 출애굽의 인도자로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고, 신명기에서 그 출애굽의 인도자를 “메마르고 부르짖는 광야에서 ····· 새끼들을 보호하는 독수리 같이”(신 32:10-11.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백성을 호위하는 분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본문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바라’(ar"B))))하심으로써 창조된 하늘과 땅을 보존하시고 보호하시며 단장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지시합니다. 즉, 성령은 성부의 성자를 통한 창조를 보존하고 유지하며 단장하는 사역을 하십니다. 질서와 평화의 하나님이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창조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그것을 아름답게 단장하십니다. 혼란스러운 우주(Chaos)가 아니라 조화로운 우주(Cosmos)를 즐기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사역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는 인간 창조에 집중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는 인간을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숨을 쉬는 산 존재가 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숨이 그 코에 불어 넣어진 존재로 지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구약 성경에서 전능자의 기운[숨](욥 33:4), 입 기운(시 33:6)으로 묘사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나와 인간에게 생명을 줄 뿐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내재적 생명 원리가 되셨습니다. 그는 인간이나 피조물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거룩한 영이십니다(시 51:10-11; 사 63:10-11). 우리 입에서 숨이 나오는 것처럼, 성령도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특별히 인간 안에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성령의 내주를 가진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온 피조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시편 8:5절은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의 한 부분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면류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를 천사(또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WhrEJ.[;T. rd"h'w> dAbk'w> ~yhil{a/me j[;M. WhrES.x;T.w:)))))).”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즉 성적(性的) 존재로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인류의 형성을 내다 보셨습니다. 곧 자기 형상을 가진 백성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가장 안락한 곳인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극진히 대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거주 공간을 만드시고, 자기 피조물인 인간을 섬기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두 가지로 특징 지워 집니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와 “사랑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amor Dei)”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세계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세계에 비교 대상이 없어 스스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지으신 자가 지음 받은 자에게 자신을 개방하지 않으시면 인간은 하나님에 관한 유비적(類比的, analogical) 지식을 습득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질서에 속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질적 차이를 전혀 포기하지 않으시면서 자신을 개방하셨습니다. 그 방식은 바로, 인간이 모든 피조물에는 다 참여할 수 있을지언정,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는 참여하지 말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언약’이라 부릅니다. 호세아 6:7절에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최초의 인류 아담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언약이 체결되는 데는 4개의 구성요소가 존재해야 하는데, 우리는 창 2장 본문에서 분명하게 그것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①언약의 당사자: 하나님과 아담, ②언약의 조건: 순종, ③상벌: 생명과 사망, ④언약의 증표: 생명나무.

성 어거스틴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를 통해서(창1-2장; 롬 5:12-21; 고전 15:22, 45-49), 이러한 아담의 상태를 ‘순수의 상태’(the state of integrity) 곧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고’(posse non peccare, not to sin), ‘죽지 않을 수도 있는’(posse non mori, not to die) 상태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담이 언약을 지켰다면 ‘죄를 지을 수도 없고’(non posse peccare, the inability to sin), ‘죽을 수도 없는’(non posse mori, the inability to die)  ‘영광의 상태’(the state of glory)로 전이되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창조세계에 대한 모든 생각은 성부께, 창조의 지혜는 성자께, 창조세계를 단장, 보호, 보존하시는 일은 성령께 돌려집니다. 이 사역들은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창조주이시며 특별히 창조 세계를 단장, 보호,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매년 5월이 되면 장미꽃이 피어나는 데, 이는 성령의 보존과 통치 사역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보존과 통치의 사역을 생각하면, 장미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결코 우연으로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 공중에 새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성령 하나님의 돌보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3. 인간의 타락과 성령의 내주가 거두어짐

인간은 본래 성령의 충만한 내주(indwelling)를 누렸습니다. 존 칼빈은 창 1:27절을 주석하면서, 아담이 성령의 충만한 내주를 경험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개혁파 신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성령의 내주에 대한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설명을 들어 볼까요? "하나님이 자신의 모양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고, 자신의 성령으로 그 인간 안에 내주하며 활동하고, 그의 마음과 머리에 영향을 미치며, 그에게 말하고 그에게 자신을 알리고 이해시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내려오심, 적응, 하나님의 의인화이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그런 범위에서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계시의 가능성과 또한 성육신의 가능성은 창조와 더불어 그리고 창조 가운데 주어졌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습니다. 반역과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와 파급되었습니다. 인간과 창조세계는 전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머리로 창조된 아담의 반역으로 죄가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본성의 부패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행위를 통해 인류에게 상속되었습니다. 인간 남녀의 생식 과정에서 사망이 인간에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본성적 부패’(the corruption of nature)와 ‘죄의 다스림’(the governance of sin)이라는 안팎의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본성적 부패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입니다. 본성적 부패를 경험한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잃었고(지식), 하나님을 싫어하게 되었고(정서), 하나님을 거역하는(의지) 존재가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이것은 죄책(guilt)과 죄의 오염(pollution)입니다. 죄책과 죄의 오염은 하나님의 형상인 의와 거룩을 파괴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그 결과는 고난과 죽음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남으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내주도 마침내 거두어 집니다(창 6: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호의로운 내주(intimate indwelling)가 인류에게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5:1-9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신의 주소지를 갖기 위해 성소를 지으셨습니다. 회막 즉 성소가 지어진 후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자신의 거소로 정하시고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출 33:7-11). 이 거주는 성령을 통한 거주였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성령을 거슬렀다고 말했던 것입니다(행 7:51).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으나 각각의 백성은 성령의 내주를 갖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실 때마다 성령으로 각 사람을 감동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구원할 것에 대한 새 언약(렘 31:31-33; 눅 22:20; 고전 11:25; 히 9:15)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새 언약이 인류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 언약의 중보자’(the mediator of a new covenant)가 필요했습니다. 히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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