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istles(NT)     1_Thessalonians 2:13~13
은혜의 방도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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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방도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이승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개혁신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신학이다. 그런 점에서 개혁신학은 어거스틴의 은혜 이해를 계승하면서 그것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더 철저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신학의 입장이다. 이 말을 그저 수사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아주 철저하게 이 점을 주장한다. 따라서 개혁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sola gratia) 의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른 믿음이다(sola fide). 이 믿음으로만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구원에서도 그러하고, 우리의 교회와 예배와 삶에서도 그러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들어가는 말: 은혜 전달의 통상적 방도들
그런데 개혁파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되 통상적으로는 은혜의 방도를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이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여 중생시키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에서는 마치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말씀에 갇혀 있는 것을 시사(示唆)하는 루터파 신학자들이 애용하는 “말씀을 통하여”(per verbum)라는 용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오히려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또는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는 뜻으로 “말씀과 함께”(cum verbo)의 원리를 강조해 왔다. 이렇게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강조하는 것이 개혁파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개혁파는 성령님과 말씀 모두를 강조해 온 것이다.
통상적인 ‘은혜의 방도’(media gratiae)로 (1)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즉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2)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visible word of God)인 성례만을 언급하기도 하고, 이에 (3) 기도를 더하여 은혜의 방도로 제시하기도 한다. 기도는 기도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사상과 감정과 세계관을 고치게 하시고, 결국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적용하게 하셔서 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이니, 그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작용하여 은혜를 베풀게 되므로 이는 결국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의 한 측면이 된다. 그러므로 사실 기도를 은혜의 방도로 언급하는 것이나 이를 빼고 기도의 과정 가운데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그 내용을 생각하면 결과는 같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은혜의 방도로서의 말씀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말씀”(verbum visibile)이요 “이미 믿는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 시키는”(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5문) 은혜의 수단인 성례에 대해서는 개혁 연대의 2014년 모임에서 로버트 레담 교수께서 이미 논의한 바 있으므로, 이번에는 은혜의 방도로서의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 verbum invisibile)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만 논의하기로 하겠다. 루터파와 개혁파에 의하면 “일차적이고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이 말한 바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는 이 말씀의 진정한 의도가 어떻게 우리들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인지를 살피는 것이 우리의 종국적 목적이다. 그리하여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우리들 가운데서 역사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논문을 시작한다.
1. 하나님 말씀의 삼중 형식 중 ‘기록된 말씀’ 중심의 이해
개혁신학에서는 늘 하나님 말씀의 삼중 형식에 대해서 이야기 해 왔다. 성육신하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the living word of God)이신 성자와 그에 대해서 성육신 이전에 구약에서 그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고, 그에 대하여 신약에 기록된 그야 말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the written word of God)인 성경, 그리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the proclaimed word of God)인 설교가 하나님 말씀의 삼중 형식이다. 이를 20세기에 유행시킨 칼 바르트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이런 용어와 이런 이해를 바르트가 만들어 낸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를 말하는 바르트는 이것이 루터와 개혁자들과 정통파 교회들이 항상 하던 말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말한다. 참으로 이는 바르트 이전에 성경적 신학이 늘 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바르트는 이 중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전개하여 소위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m) 또는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 이해를 제시하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유일의 계시가 된다. 그는 이런 입장에서 구약과 신약의 내용을 계시와 직접 동일시하기를 거부했으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자신이 유일한 계시라고 여긴 그리스도에 의해 판단하려 했다. 그에게 그리스도가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다(the Word of God). 그래서 바르트는 게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논하면서 상대적이지 않은 “계시 자체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 안에서 성취된 화해와도 다른 것이 아니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성경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증언하는 인간의 말이요, 성령께서 역사하사는 순간에만 하나님 말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인 하나님 말씀인 것은 오직 계시의 순간에서 이며, 그 순간도 역사와 시간 안에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에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고, 계시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werden) 것으로 계시에 대한 증언으로 여겨질 뿐이다. 참으로 바르트는 이와 같이 말한다: “성경은 그것이 계시를 참으로 증언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하는 것이 이 시대에 신학이 살아 있을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므로 바르트에 의하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도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어야 하며, 오직 그런 한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선포는 그것이 참으로 계시를 약속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이 세상 시공간 가운데 있는 것은 무엇이나 이와 같은 잠정성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항상 궁극 이전의 것(pen-ultimate)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항상 시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그리스도뿐이다. 그는 그야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the living word of God)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소위 “말씀의 신학”의 근본적 내용이고, 여기서 그의 역동적 특성이 늘 드러난다. 바로 이런 의미의 역동성이 바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 일원론이고, 그리스도 중심주의이다.
이에 비하여 개혁파 정통주의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중심적 입장을 견지한다. 개혁파 정통주의는 성경을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긴다.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전했고 기록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모압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신 28:2)라고 말했다. 성경에 기록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입장이기도 했다는 것을 우리들은 강조한다. 예수님께서는 고르반이라는 말을 하면서 부모를 공양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잘못을 강하게 비판하시면서 그들이 하는 일은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6)고 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소개하면서 “기록되었으되”라고 강한 권위를 부여하면서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언급하시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되”(마 22:31)라고 하신다. 성경에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 자체가 성경에 있는 것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로마서 12:19)고 하여, 구약 말씀을 인용하고 그것을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 개혁파 선배들은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언급하기로 기뻐하였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중요한 한 측면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이 완결되자... 이제 특별 계시를 새롭게 형성하는 요소들이 더 이상 덧붙여질 수 없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왔고, 그의 사역은 다 이루어졌고, 그의 말씀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별 계시가 완성된 상황에서는 “특별 계시는 성경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현존하며 계속 지속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를 아주 분명히 천명한다. 우리는 제 1 장 성경에 대한 고백을 하면서 1항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지되어 버렸다”는 진술과 6항 중에 진술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아니면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이든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가 없다”는 말을 중시해야 한다. 이런 상황은 그리스도께서 재림 할 때까지 계속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특별 계시사(historia revelationis)는 그쳐졌으나 구속사(historia salutis)는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빙크가 잘 표현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객관적인 특별계시는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완성되었고, 그 계시의 효과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 인류 역사에서 완전히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개혁파 정통주의도 지금도 살아계시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모두 중요시하여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으로 신학을 하려 하기에 개혁파 정통주의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결국 삼위일체 중심주의가 된다. (바르트도 삼위일체를 말하나 그의 삼위일체 이해는 정통적 삼위일체 이해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서 정통파 신학자들은 그가 제시하는 방식에 대하여 안타까워한다). 개혁파 정통주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도 “하늘”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숭하며 경배한다. 그런데 그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이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기에 개혁파 정통주의는 인식론적으로 성경으로부터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게 접근할 수 있기에 정통파 그리스도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께서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는 “객관적 계시에 새로운 것을 첨가한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계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신자가 이 객관적 계시를 알고 자신의 것으로 삼도록 도울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성령의 사역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다른 이름들, 특히 조명과 중생으로 불린다(고후 4:6; 요 3:5).” 따라서 “분명한 구분을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님의 사역은] 조명으로 지칭되는 것이 더 좋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를 들자면, 바울 사도가 옥에 갖혔을 때에도 사도가 전한 말씀을 다른 형제들이 그대로 전하는 것에 대하여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 1:14)고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설교가 바른 설교이고 하나님 말씀의 전달이려면 항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하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에 대해서도 우선권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말 성경에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번역된 “선포”로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므로 기록된 말씀은 항상 선포되고 풀어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파 정통주의는 설교도 항상 강조하였다. 성경 없이는 선포될 것이 없고, 선포 없이는 효과적인 전달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선포의” 미련한 것으로 맏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족 하나만을 덧붙이고자 한다. 그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처음에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아모스는 자신이 선포하는 것에 대해서 이것이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고 하면서, 따라서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다(암 3:13). 스가랴가 하나님을 대언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역대하 24:20,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고 한다. 또한 예레미야가 이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신 이 모든 말씀을 말하기를 마치니”(예레미야 43:1,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이처럼 구약에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선지자들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신 27:10; 신 28:10; 수 3:9; 수 23:14-15; 삼상 9:27; 삼하 7:25, 28; 왕상 20:28; 왕하 22:15; 왕하 23:16; 대하 33:18; 사 21:17; 렘 23:23; 렘 25:27; 렘 39:16; 렘 42:20-21; 렘 45:2). 따라서 구약의 신실한 백성들은 선지자가 전하는 말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서 엘리야에게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왕상 17:24)라고 했다.
또한 처음 신약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 가운데서도 열심히 기도하고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이 말하는 것에서도 사도들에 의해서 선포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이 저도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해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행 13:5)이라고 하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라고 하여 (행 13:44) 바울이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고, 바울이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고 했다(행 18:11). 따라서 사도들의 말을 듣고 복음을 믿는 것에 대해서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행 11:1)과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선포한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성문화하기를 원하여 성경이 형성되고 우리에게 계시로 주어진 것이다. 또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계속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읽혀져서 사람들에게 들려지기를 원하셨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고 했던 것이다. 또한 골로새서를 보내면서 바울은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 4:16)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기록된 말씀도 선포되고 들려지기 원한 것이다. 그렇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연관해서 선지자나 사도가 선포한 것과 그것을 기록한 것과 우리들의 선포를 정확히 비교하여 연속성과 차이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선자자와 사도들이 선포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들이었다. 나단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대상 17:3),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대하 11:2) 등을 잘 생각해 보라. 만일에 하나님께서 직접 주지 않은 것은 선포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로 여겨졌다(신 18: 20, 22 참조).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전하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선포 가운데서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을 성령 하나님께서 영감하여 기록하게 하신 것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여기에 선지자와 사도들의 선포와 성경의 연속성이 있다. 성경 기자들이 기록한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날 목사님들이 설교하는 말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여기에 연속성이 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다(여기에 비연속성이 있다!). 여기서 개혁주의적인 바른 설교와 신비주의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조엘 비키도 이와 같은 의미의 말을 다음같이 표현한 적이 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경험을 분리시키는데 반해,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은 말씀 중심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를 높임,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같은 경험적 기독교를 요구한다, 이런 설교만이 본질적으로 교회의 건강과 번영을 가져 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1) 성경에 근거해서 (2)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전달해야만 한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회중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다음 주제가 주어진다.
2. 설교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려면?(1) 전제 조건
그러므로 목사님들이 하는 설교가 하나님이 말씀이려면 그 설교가 성경의 의도를 통해 나타난 신적 저자인 하나님의 의도를 잘 전달해야 한다. 성경의 의도를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를 흥미롭고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중세 말기의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당시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마을 주민들 상당수가 주일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였고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 순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참여하였으나 미사를 집례하는 사제(제사장, priest)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의하면서 소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정성껏 참여하면서 “은혜 받는” 사람들도 있었고, 곳곳에서는 주일 아침 미사와는 달리 주일 저녁 예배 시간에는 그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로 성경과 기독교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설교도 듣기도 했었다. 또한 야외에서 설교자들이 그들이 쓰는 언어로 종교적인 것에 대해서 선포하는 것을 잘 듣기도 했었다. 이런 예의 하나로 후에 벨직 신앙고백서의 초안을 쓴 귀도 더 브레의 어머니가 오늘 날 베기에의 남주 지역에 큰 도시인 몽스(Mons)에서 순회 이탈리아 제슈이트 수도사가 길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을 듣고서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왜 이와 같은 아들을 주시지 않으십니까? 내 뱃속의 아기가 당신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했었다고 하니, 그녀는 자신이 사용하는 중세 불어로 그 제슈이트 설교자의 설교를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 때의 그 설교는 분명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것이었으나 결국 잘 따져 보면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선포된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기 어렵다. 제 2 바티칸 공의회(1962-1965) 후에는 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서 많은 성당에서 모두 다 자국의 언어로 미사를 집례하며 강론도 자국의 언어로 한다. 성경을 풀어 설명하기도 하고 그곳에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필 때 천주교의 미사 시간에 선포 되는 강론을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루터의 기본적인 고민이 있었다. 만일 어떤 교회 안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가르침인 이신칭의의 복음이 바로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곳은 과연 바른 교회일 수 있는가를 루터는 질문했던 것이고, 이런 고민 가운데서 이신칭의 교리는 그와 함께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교리라는 확신 가운데서 이신칭의를 분명히 하지 않는 천주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선언이 단기간에 쉽게 나온 선언이 아니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 선언을 한 루터도 그렇고, 이런 가르침을 믿고 난 후에 성경적 가르침과 당대 교회의 가르침을 비교한 사람들은 오랫동안의 심각한 고민의 기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영적 전투의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성령님께 속해 있고 그들 안에 성령님의 역사가 있을 때 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의미를 떠나서 선포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설교는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교회에 그대로 속하여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천주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말씀의 밝은 빛이 비추는 데를 향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는 제네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아 가장 체계적으로 가르쳐 지는 곳을 향해 가기도 하였고, 일차적으로 성경을 읽고 루터나 다른 개혁자들의 글들을 열심히 읽어 나갔다. 바르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냥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성경의 가르침을 잘 해석해서 선포해 주는 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갈구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시면서 인용하셨던 말씀의 참된 의미가 잘 드러나게 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그리하여 어느 시대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갈구하고, 그것이 없으면 주린다고 느끼는 것이다. 말씀이 없으면 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용하려면 근본적으로 성경을 영감하신 성령님께서 설교도 사용하셔야만 한다. 개혁파에서는 항상 성령님의 이 역사를 강조해 왔다. 칼빈은 시편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만일 우리가 계명을 준수하는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사실을 인정한다면,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해와 깨달음의 눈을 열어 주시기 전까지는 우리 모든 인간들이 눈먼 장님일 뿐이라는 것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개혁파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신다”고 한 것이다. 여기 소위 “cum verbo의 원리”가 나타난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어 사용에 있어서 이런 용어를 유지하고 사용하는 것이 좋다. 과거 청교도들 일부와 그 전통을 따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를 가르쳐서 설교에 “기름 부어주심”(anoint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결국 성령께서 은혜를 베푸심과 성령의 기름 부어주심 - 이 둘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다. 한국 교회에서는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을 그렇게 자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이 용어를 써서 표현하는 것은 거의 잃어버린 용어를 다시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핵심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에 부합하게 만드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온전히 성령님께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만이 설교의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 작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 성령님께서 선포되는 말씀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심이다. 은혜를 주시는 주체가 성령 하나님이심을 아주 분명히 하고, 늘 의식하여 우리의 설교 가운데서 성령님이 역사하시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신비한 일이고, 우리가 도무지 조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역에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 조작하는(manipulation) 시도나 그런 의도가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패커의 말이 적절한 것이다: “심리적 압박을 행사하여 무엇인가를 결심하게 만드는 모든 장치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것은 성령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뻔뻔스러운 짓이다.” 그러므로 이 일에 있어서 인간은 수동적이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할 수밖에 없다. 패커가 잘 강조한 바와 같이 “전달된 메시지를 사용하여 인간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 맡겨야 한다.” 그렇기에 기도가 매우 중요하다. 설교 준비 할 때의 기도, 설교를 준비한 후의 기도, 설교하면서 내적으로 하는 기도, 설교 후의 기도 등 온전히 주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온전히 성령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의 장로교 목사로 에딘버러 대학교를 졸업하고 장로교적 신념 때문에 화란으로 갔다가 돌아와 런던에 있는 스코틀란드 회중을 섬긴 아주 열정적인 설교자로 알려진 로버트 트레일(1642-1716)이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고 한다: “많은 훌륭한 설교들이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연구하고 준비할 때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의도적으로 조작하지 않더라도 설교자가 어떤 식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성도들이 은혜 받는 듯 하는 지를 알아 그런 방법을 추구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것이다. 오랫동안 설교하면서 이런 분위기를 알아 그런 분위기를 추구해 가는 것은 결국 인위적 시도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성실하게 목회하고 인위적 조작을 하지 않는 목사님들도 이런 분위기 형성을 성령님의 역사라고 오해하기 쉽기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3. 설교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려면?(2)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성경을 어떻게 풀어서 가르쳐야 그것이 은혜의 방도로 사용되는 일에 기여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다음 같이 하면 분명히 그것은 은혜의 방도로 작용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임을 먼저 언급하기로 한다. 내용상 이를 역으로 하면 그것이 제대로 하는 것이라는 함의를 전달한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한다고 해도 그저 자연스럽게 은혜의 방도가 된다고 기계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성령님의 사역과의 관계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 하지만 그저 수동적으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기를 기대하면서 이 거룩한 일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이렇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일을 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는 역시 지나친 알레고리적 해석의 문제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우리가 알레고리 해석을 해야 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친히 그와 같은 의도로 말씀 하셨고, 친히 알레고리적 해석을 제공하셨으므로 그에 따라야 한다. 비유를 주신 주님 자신이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눅 8:11), 또한 가라지 비유에서는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들은 천사들이니”(마 13:37-39) 등으로 설명 하셨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이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알레고리적 의도가 없는 것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바른 성경 해석이 아니고, 바른 설교라고 할 수 없다. 교부들의 성경 해석이나 중세의 해석, 그리고 과거 건전한 주석가들도 알레고리를 시도했으니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도무지 버리지 않으려는 것이 된다.
둘째로, 성경 본문에 대한 문맥을 벗어난 읽기와 그런 탈문맥적 읽기에 근거한 설교는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과 거리가 멀고, 동시에 성령님께서 은혜의 방도로 역사 하시는 것과도 관계없다고 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시편 23편을 설명하면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는 도다”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원수들이 보는 데서 우리에게 상(償)을 주신다고 설명한다면 그와 같은 것이 맥락을 벗어난 읽기와 설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문맥에 유의하지 않음으로 본문 자체의 독특한 강조점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예로 신약적 종말 개념을 잘 드러내면서도 안타깝게 고후 5:15, 17의 문맥에 잘 유의하지 않음으로 그 본문이 제시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만물의 새로운 피조물 됨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예들이 있다. 그들은 일반적인 해석을 따르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논의한다. 이와 같은 해석과 논의들을 (고후 5:15, 17의 문맥을 잘 드러내면서) 이것은 구속사적이고 신약-종말론적인 의미에서의 피조계 전체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워짐에 대한 언급임을 잘 드러낸 해석들과 대조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점의 하나로 요한계시록 21장에 나타나는 새 예루살렘을 어떻게 이해하고 제시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물론 다른 해석의 예들도 있지만, 오늘날 문맥에 유의하는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종국에 있게 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 거주하게 될 하나님의 백성, 즉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표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특히 요한계시록 21:9 이하에 그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를 하면서 “어린 양의 신부를 보여준다”고 표현하는 데서 이것이 아주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이 본문과 관련해서 다른 해석을 제시하는 경우에는 적어도 왜 그 자신은 다른 해석을 제시하는 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도 새 예루살렘을 새 하늘과 새 땅과 거의 같은 것으로 그리하여 “새로운 에덴”(the New Eden)으로까지 표현하는 것은 주어진 본문의 맥락에 충실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탈문맥적 해석의 전형적인 경우들은 비슷한 단어를 다 연결시키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신천지의 해석이나 소위 다락방 운동을 하시는 분들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셋째로, 지나친 도식화도 성경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는데 방해를 할 수 있다. 때로는 매우 유명한 학자들도 이런 잘못을 범하곤 한다. 성경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어떤 도식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도식이 성경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아닐 때는 무리하게 우리가 그 도식을 넣어서 읽는 것이기에 주의해야 한다.
이런 도식화의 가장 흔한 예로 지나친 모형론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 자체가 제시하고 있는 바른 모형론이 있다. 그에 따라서 구약의 어떤 제도나 인물이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구약 희생 제사 제도와 그와 관련 된 것이 장 차 오실 그리스도 관계시키는 것은 성경 에 제시된 모형론을 잘 따르는 것이다. 성경에 그에 대한 시사가 분명히 있는 경우에 한하여 이런 모형론을 도출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 그런 시사가 없는 데 그런 모형론을 찾으려 하는 것은 언제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서, 여리고성에서 라합이 늘어뜨린 붉은 줄을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에 대한 모형으로 본다든지, 야곱이 에서에게 제공한 붉은 것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보혈을 생각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와 같이 잘못된 도식화를 시도하는 것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은 학자들의 지나친 도식화 시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그것이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을 방해하는 경우들도 자주 본다. 성경의 상당히 많은 곳에서 “카이 구조”를 찾아 그것에 근거하여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는 경우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성경의 구조상 분명한 “카이 구조”를 찾아 제시할 수 있는 곳이 있고, 그것을 통해 본문의 강조점이 나타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자의적으로 이런 구조를 거의 모든 곳에서 찾아내는 것, 이와 비슷하게 inclusio 구조도 무리하게 찾아내는 것도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게 한다.
근자에는 성전 모티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창세기 앞부분에서도 성전 모티프을 찾아 읽어 보려는 해석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하면 창세기 앞부분의 기록 연대에 대한 질문을 일으키고, 과연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그 부분을 작성하게 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을 일으키기에 건전한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4. 설교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려면?(3) 해야 할 것들
그렇다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해석하여 우리의 설교가 은혜의 방도로 작용할 수 있는 우리 편에서의 최선의 작업을 하는 것일까?
첫째는 위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한 것들을 뒤집어 바르게 해석한 내용을 찾아야 한다. 즉, 성경에 나타난 경우가 아니면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지 않고, 문맥을 잘 살펴서 그 문맥 안에서 주어진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가를 살피고, 자신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도식을 넣어 해석하지 않고 본문 자체의 의미가 드러나게 해야 한다. 한 마디로 본문에 무엇인가를 넣어 하는 해석(eisgesis)이 아니고 본문이 말하는 해석을 이끌어 내는 것(exegesis)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성경 본문으로부터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 낼 수 있게 된다.
둘째는 그 내용이 과연 어떤 계시사적 맥락에서 주어진 것인지를 파악하고, 그 계시사 내에서의 말씀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와는 어떤 관계를 지니는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특히 구약 본문을 생각할 때는 이것을 깊이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구약과 우리는 같은 계시사적 정황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구약의 각종 절기를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려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사역으로 그 절기가 지향하던 바가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생각하지 않은 잘못된 적용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절기와 구약의 율법적 규정들에 대해서는 그 율법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성취된 우리들의 시대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알고 그것을 그대로 지키지 않으면 서도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계시사적인 고려를 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으므로 주의해야만 한다. 또한 구약 절기를 적당히 신약의 절기와 맞추어 그 연속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려는 시도도 잘못된 것이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다른 계시사적 지평에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의식법을 온전히 이루신 신약 시대에는 이 땅 위에 더 이상 특별한 직분으로서의 제사장이 따로 있지 아니하고,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삶과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이고(롬 12:1) 다들 왕 같은 제사장인 것이다(벧전 2:9).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 모두가 그들의 존재 전체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인 것이다(벧전 2:5). 이것을 변용하여 이제 신약에는 제사장 직분은 따로 없으나 제사장적인 활동은 있을 수 있다고 한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신 그리스도의 중보직을 훼손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신약 성경에 있는 명령은 비교적 쉬운데 신약에 명령된 것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으니 이는 신약과 우리가 같은 계시사적 지평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에도 시간과 역사의 거리와 그로 말미암는 해석적 지평의 융합은 필요하다. 그리고 신약 성경이 기록되고 있는 시기는 아직도 계시가 주어지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주어진 계시라는 점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의 특별계시가 완성된 시점에 있는 우리와 다르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에서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린도전서 14:39)라고 한 말을 그대로 적용하여 오늘날도 예언이 지속되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그와 같이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사적인 고려가 매우 중요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성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세대주의자들이나 성경에 대한 무시간적 접근을 하시는 분들의 문제가 여기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는 그렇게 바로 이해된 내용일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이번에 전할 내용과 방식을 결정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그 내용을 차근차근 알려서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경륜을 잘 파악할 수 있고, 그 나라 백성 역할을 제대로 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강조할 것인 설교는 주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엘 비키가 이와 관련해서 적절한 말을 한 바 있다: “하나님 말씀의 문법적 역사적 의미만을 제공하는 목사는 강연을 하는 것일 뿐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참으로 바른 교리를 설명하면서도 설교를 잘못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리쳐드 박스터는 이런 경우에 대해서 애통해 하면서 다음 같이 말한 일도 있다: “목회자가 참으로 훌륭한 교리를 설교하면서도 엄밀하고도 생명력 있는 적용을 사장 시키는 것처럼 슬픈 닐은 없다.” 물론 설교는 철저히 바른 주해에 근거해야 한다. 바른 주해에 근거하지 않은 설교는 바른 설교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주해의 과정 자체가 설교인 것은 아니다. 간혹 주해의 과정을 설교 중에 언급하는 것이 필요한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는 목사님이 시간을 들여서 철저히 주해한 결과를 가지고 성도들이게 설교가 주어져야 한다. 그 결과 그 설교는 생명력 있어야 하고, 결국 “모든 영광을 삼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신학적 주해”를 한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펄젼은 조금은 과장하면서 “적용이 시작되는 바로 그 지점이 설교가 시작되는 곳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에서는 목사는 본문이 말하는 교리를 잘 증거한 후에 “회중에게 그것을 적용함으로써 그 교리를 절실히 느끼게 하고 확신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 지를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모임 분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설교자들에게 신중함과 열정과 묵상을 요구하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부패한 죄인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다”라고 자신들의 경험에서 온 관찰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신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의무를 다하게 하고 그들의 죄를 생각하면서 겸손하게 하고, 위로를 받음 강해지도록” 해야 한다고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에서 설교 방식까지를 잘 지시하고 있다.
5. 설교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려면?(4)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할 것들
이상에서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일을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일까? 성경은 성도의 책임도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과연 어떤 마음과 태도로 설교를 들었고, 그리 할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다음 같은 말로 소개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말씀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확증된 이 경우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1) 성도들이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말하며, (2) 이 말씀이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다는 마음과 태도로 듣고, 그렇게 배운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이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이런 열심과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을 때에는 성도들에게도 이런 분별에 근거한 노력과 열심히 나타났었다. 그런 시대와 장소의 하나가 청교도 운동이 일어난 영국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죠오지 워커(George Walker, 1581-1651)는 당시 아직도 천주교인들이 많았던 랭카셔(Lancashire)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역에서는 바른 “설교를 들을 수 없어서” 바른 “설교를 듣기 위하여 기꺼이 먼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해석하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사업상의 이익을 다 내려놓고 주중의 노동과 일까지도 제쳐 놓았다”고 하기도 했다. 또한 일리(Ely)의 주교인 리차드 콕스(Richard Cox)에게 자신의 유일한 관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자신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라고 써서 그를 감동시킨 바 있는 청교도 목사 리챠드 그린햄(Richard Greenham)이 캠브리지 근처의 드라이 드레이톤(Dry Drayton)에서 목회할 때(1570-1588) 캠브리지 학생들과 멀리서 온 방문객들이 늘 그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고 한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설교할 사람들을 잘 훈련할 수 있는 교육 기관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였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엄격한 훈육 가운데서 개신교 설교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당시 재무 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였던 월터 밀드웨이(Walter Mildway)경이 1587년에 세운” 캠브리지의 엠마뉴엘 컬리쥐(Emmanuel College) 창설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심지어 그들의 교회 건물까지도 설교를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그래서 제임스 화이트(James F. White)는 청교도 예배당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깨끗하고 조명이 잘된 예배당은 청교도 예배의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였으니, 그것은 아무런 방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초창기의 성경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도 나타낸 열심이었다. 열심과 함께 바른 분별력이 성도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가면서
은혜의 방도로서의 말씀 마지막으로 다음 같이 심각한 도전의 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요 8:43). 바르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함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이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도 큰 도전이며,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도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친히 하신 예수님이나 그와 같은 태도로 섬긴 사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으면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몰아내는 일을 하는 것이기에 그저 삯꾼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해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이 교회를 해하는 것이 된다.
또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정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이유 때문에 듣지 않는 것은 아합처럼 자신이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함을 드러내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중요한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